삼별초의 대몽항쟁
- 최초 등록일
- 2008.06.03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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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논문입니다.
평가부탁드립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개경환도와 삼별초의 봉기
1.개경환도의 추진과정
2.삼별초의 봉기
Ⅲ. 삼별초의 항쟁
1.삼별초의 진도항쟁
2.삼별초의 제주항쟁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머리말
삼별초는 몽고의 고려침입직전 고종 17년(1230)경, 무인 집정자 최우에 의하여 설치된 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는 치안 유지를 비롯한 국가 공권력 강화를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설치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무인정권의 외호를 담당하는 기능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야별초가 후일 수가 늘어남에 둘로 나누어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라 하고, 몽고군에 잡혀갔다 돌아온 고려인들을 모아 신의군(神義軍)을 창설함에 이 셋을 모아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의 기원에서 보더라도 이들은 무인정권의 외호기능과 함께 고려 내부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반몽집단 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강화천도는 최씨 정권이 몽고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고 나아가 강화 과정에서의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에서 또한 드세어지는 초적과 지방 일반민들의 반정부적 활동으로부터 그들의 안전 및 정권의 보전을 도모하기위해 단행된 것이다.
강화천도 이후 고려정부는 몽고의 내륙침략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정부의 별다른 지원 없이 스스로 방어군을 조직하여 침략군과 적극적으로 대결 하였다. 개경환도를 결의하게 되자 40년동안 무인정권의 항몽책 추진의 핵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군은 봉기하였다. 삼별초는 강화를 포기하고 곧바로 남천하여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서남해안 진도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삼별초의 남해항쟁은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 정권이 붕괴되고 마지막 배후기지인 제주마저 공함되면서 그들의 최종적 목표를 이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항쟁의 주도층은 민인들과 이해를 공유하고 광범위한 계층의 호응을 적극 이끌어내면서 새로운 국가를 지향한 항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몽고의 침략으로 곤경에 봉착한 백성들은 외세의 침략이라는 대외적 상황에 의하여 정부와 손잡고 대몽전에 임하게 되었는데 일반 백성들이 항몽의 주체로써 참여 하였다는것은 주목할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