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민자영
- 최초 등록일
- 2008.06.03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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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역사속의 여성 이라는 수업에
명성황후를 주제로 제출한 과제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 국모의 자리에 오르다.
- 개방정책을 주도 하다.
2. ‘ 여우사냥 ’ -을미사변
3.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
- 당시 사람들의 평가
- 역사적 평가
Ⅲ. 결 론
Ⅳ.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명성황후의 일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 하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태어나 16세의 어린나이에 왕비가 되었고, 봉건시대에는 드물게 여성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어서 그의 일생은 사실상 한국 근대사라고도 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45년 생애동안(1851-1895) 병인양요, 신미양요,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과 같은 우리 근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6월 문화재청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 능인 사적 제207호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소재)의 침전(寢殿·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봉분 앞에 지은 집)을 해체 작업 중이었다. 문화재청은 작업 도중에 이 곳에서 재해 방지를 기원하기 위해 물 ‘수(水)’자가 새겨진 육각형의 은판(지름 45㎜, 두께 0.8㎜) 3점과 종도리 장여(도리를 받치는 모가 진 나무) 부분에서 세로 0.95m, 가로 12.9m의 붉은 비단에 쓴 명성황후의 공덕을 칭송하는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광무 5년(1901년) 8월 21일자로 된 상량문에는 간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에 대한 국모로서의 덕망과 애국심에 대한 칭찬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혜악보담어빈궁고독 공고만세종사지기[惠渥溥覃於貧窮孤獨 鞏固萬歲宗社之基] :두터운 은혜가 널리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만세에 계속될 종묘사직의 기틀을 공고하게 했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2년 후 광무 1년(1897년)에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명성황후 유해는 원래 청량리 홍릉에 모셔져 있다가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주장에 따라 1901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移葬)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19년 고종황제 마저 악랄한 일제에 의거 독살되어 승하하자 고종황제와 합장 됐다고 한다.
참고 자료
황원갑, 2002, <<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 >>, 책이있는마을
이수광, 2006, << (한국 역사의) 美人 : 천년의 향기 >>, 영림카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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