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O의 코소보 사태 개입은 정당한가
- 최초 등록일
- 2008.06.06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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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코소보에 대한 소개하는 글이 있고, 와 코소보 분쟁에 개입한 NATO의 행태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목차
서론 - Ⅰ. 보고서 주제의 선택 동기 Ⅱ. 코소보 사태의 개요
본론 - Ⅲ. 코소보 사태에 대한 나토의 개입
결론 - Ⅳ. 인도적 개입은 없다
본문내용
공습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토와 러시아는 코소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 하였으며 마침내 1999년 5월 20일 G7 G7이란 프랑스미국영국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로 세계의 부와 무역을 지배하고 있는 서방 7개 선진공업국의 연례 경제정상회담을 말함. 목적은 세계정세에 대한 기본인식을 같이하고, 선진공업국간의 경제정책조정을 논의하며, 자유세계 선진공업국들의 협력과 단결의 강화를 목적으로 함.
과 러시아는 코소보 평화안의 초안에 합의하였다. 1999년 5월 29일 유고는 코소보 평화안의 수용을 처음으로 밝히면서 코소보 분쟁의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6월 3일 유고 정부는 마침내 코소보 평화안을 수용할 것을 발표하면서 코소보 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같은 해 6월 9일에 나토와 유고는 유고군의 코소보 철군에 관한 군사실무 협정에 합의함으로써 78일간 지속되던 코소보 전쟁은 종결되었다. 유고연방의 밀로셰비치가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의 강경한 압력을 받은 러시아가 유고 연방에 나토의 공습을 방어할 대공 무기 제공을 거부하였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세르비아에 원유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미국에 의한 모스크바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타르트 알리외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유고연방군의 코소보 철수개시에 따라 나토의 유고 공습이 중단되면서 코소보에는 평화유지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나토의 단일 지휘를 받는 총 5만명 규모의 국제평화유지군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에 따라 ‘유엔 감시 하’에 단기적으로는 약 4만 명에 달하는 유고연방군의 완전한 철수를 감독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코소보 내 적대행위의 재발억제와 수십만 알바니아계 난민의 안전한 귀환 및 재정착 지원, 코소보해방군의 무장 해제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국제평화유지군은 유고군 전면 철수 이후 주요 지휘거점을 접수하고 코소보 접경 세르비아 내부의 완충지대까지 장악한다는 점에서 점령군이나 다름없었다.
참고 자료
발칸 분쟁사, 김성진 지음, 우리 문학사
지구화시대의 인권과 국가주권, 주정립, 논문
왜 명분에 집착하고 의도와 결과를 외면하는가, 김창진, 학술정보관
세르비아 역사, 두산 바타코비치 외, 도서출판 선인
코소보 사태에 대한 단상, 노대명, 학술정보관
한양대학교 아태지역 연구센터 <코소보 전쟁과 새로운 국가안보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