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본론 중 일부 입니다.
1) 일제의 전라도지역 수탈 배경
1899년 5월1일 개항한 군산은 조선 최대의 쌀 수출항으로, 1929년 당시 군산항의 수출액 34,223,289원 가운데 쌀 수출액이 33,673,886원으로 전체 수출액의 98%를 차지하였다. 일제가 군산항을 이용한 것은 당시 호남평야의 곡물을 수송하기에는 호남선이 생기기 전이므로 목포로 수송하기에도 멀었고, 부산까지는 당시의 운송수단으로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해운이 당시에 가장 싸고 빠른 이동로가 되었고, 군산에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후 군산은 쌀이 워낙 많다하여 쌀의 군창(군산의 옛이름, 쌀 창고라는 뜻)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같이 엄청난 양의 쌀을 일제가 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예부터 전라도 지역의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하며, 광활한 평야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 수량이 풍부하여 삼국시대부터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어왔으며, 그런 만큼 토지 겸병과 농민 수탈의 중심지가 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목차
1. 머리말
2. 본론
1) 일제의 전라도지역 수탈 배경
2) 일제의 전라도 수탈의 실태
2)-1.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지주제 강화
2)-2. 수리조합을 중심으로 추진된 산미증식계획
3) 우리 민족의 저항
3)-1. 암태도 소작쟁의
3)-2. 웅본 농장 소작쟁의
3)-3. 수리조합 반대운동
3. 맺음말
본문내용
3)-3. 수리조합 반대운동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은 수리조합 자체의 설립부터 반대하고 나선다. 이는 앞서 설립 조건 자체가 지주들에게 유리했고, 소작인들의 의견과 사정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수리조합비에다 과다한 공사비, 수세부담까지 부담하게 되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래서, 수리조합에 대한 반대운동은 수리조합이 설립되던 1910년대 초반부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전북지역의 사례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1921년 9월 익산군 농민 5,000여 명은 농지를 침해하는 수리조합의 수도를 매몰할 것을 요구하며 도청을 포위하고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1924년 7월 익산군 동산리 농민 수백명은 가뭄인데도 농민에게 물을 주지 않는 조합에 반발하여 수리조합제방을 파괴하였다. 또 1924년 8월에 고창군 공음면 두암리에서는 수리조합을 설치하면 비싼 세금을 내야한다는 데 속아 싼값에 많은 땅을 사기당하자 농민 700여 명이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며, 1924년 10월에는 익산의 600여 농민이 익옥수리조합이 삼례 부근에 만든 갑문 때문에 일부지역 음료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위를 벌였다.
참고 자료
『전북의 역사와 문화』, 동학농민 기념 사업회, 서경문화사, 1999.
『통일지향 우리 민족 해방운동사』, 강만길 외, 역사비평사, 2000.
『日帝下 전북의 농업수탈사』, 원용찬, 신아출판사, 2004.
『한권으로 보는 한국사 101장면』, 정성희, 가람기획, 2003.
『암태도 소작쟁의』, 박순동, 이슈투데이,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