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붕당정치와 북비문
- 최초 등록일
- 2008.06.19
- 최종 저작일
- 19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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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붕당정치
사림은 공론을 중시하고 삼사의 관리들은 홍문관을 중심으로 뭉치고 지위에 관계없이 정치를 비판하면서 토론을 논하였다. 상대당의 존재와 비찬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정책을 내새워 붕당정치 초기에는 건전한정치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후 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북인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무너진 후에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붕당정치가 전개, 비변사가 17세기이후 최고 정치기구로 자리를 굳혔고 의정부와, 왕권도 위축됨. 붕당정치는 붕당간의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차 변질되어갔다. 17세기말부터 자기당을 절대시하고 반대당을 정계에서 내쫓고자하는 치열한 정생으로 바뀌었고 남은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서인은 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분리되어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다가 노론중 소수의 특정가문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좌우하고 그 지위를 세습하여 장기집권을 하였다.
목차
1.조선후기 붕당정치와 북비문에 대한 전반 적인 설명
붕당정치
북비문
본론
1.붕당정치의 성립
ㄱ.붕당정치의 원인
ㄴ붕당정치의 전개
남,북인의 분열
광해군의 정치와 인조반정
인조반정 이후
예송논쟁
신임사화
ㄷ.각 당파의 정책과 특징
2. 붕당정치의 변질
(1) 붕당정치의 변질
(2) 탕평책의 대두와 특질
영조의 탕평책
정조의 탕평책
2.정조의 정책
(3)붕당정치의 한계와 성격
본문내용
1.붕당정치의 성립
ㄱ.붕당정치의 원인
지방에서 성장한 사림파(士林派)는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훈구파(勳舊派)로부터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뒤 중앙 정계를 장악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었다. 근본적 원인은 당시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훈구 정치를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후배 세대와 선배 세대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집단화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군주체제에서는 신료가 붕당을 결집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었으며, 《경국대전》에는 거기에 대한 처벌 규정이 들어 있다. 그러나 중국 송대(宋代)의 신유학에서는 구양수(歐陽修)와 주희(朱熹) 등에 의해 군자끼리 모인 ‘군자당’이 소인의 집단을 누르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고, 조선의 사림파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특히, 학문과 정치가 결합된 상황에서 붕당은 학통의 차이와 정치적 입지에 따라 많은 분기를 보이면서 정치 세력 결집과 권력 행사에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ㄴ붕당정치의 전개
남,북인의 분열
동인과 서인이 나뉜 후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했는데 선조 22년 동인인 정여림의 모반사건으로 서인 정철이 집권하게 되었다. 정철이 건저의문제로 논죄를 당할 때 그 처벌 문제로 동인들 간에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됨. 처음에는 남인이 주도, 임진왜란 후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주도함.
광해군의 정치와 인조반정
서인과 남인 등 다른 세력을 배제하며 북인이 정권을 독점 하게 된다.
광해군의 실정으로 인해 광해군과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서인과 남인의 공존체제 형성
예송논쟁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