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사상
- 최초 등록일
- 2008.07.23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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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법가사상에 대하여
2. 법가의 인물
한비
관중
신불해
상앙
3. 법가사상의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1. 법가사상에 대하여
법가(法家)는 중국의 전통사상 중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학파로써 전국(戰國)시기에 형성되었다. 춘추(春秋) 후기에 노예의 끊임없는 폭동과 봉건 지주계급의 흥기로 인하여 기존의 노예주 귀족계급 통치를 유지하였던 "예치(禮治)"가 점차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유가의 "예치(禮治)"사상에 대립하여 각 제후국에서는 변법을 통하여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풍조가 출현하였다.
전국(戰國) 초기에 위(魏)나라의 재상 이회(李悝 , 약 B455~BC395)는 ≪법경(法經)≫을 편찬하고 솔선하여 위(魏)나라에서 변법(變法)을 단행하였다. 계속하여 오기(吳起, BC 약 440 BC 381)는 초(楚)나라에서 법률을 개편하였다. 전국(戰國) 중기에 상앙(商鞅 , 약 BC390~BC338)은 진(秦)나라에서 변법(變法)을 실행하였다. 또 한(韓)나라의 신불해(申不害), 조(趙)나라의 신도(愼到) 등도 모두 자국에서 연이어 변법(變法)을 실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국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치가들로 잔존해 있던 노예주 귀족계급의 정치 경제통치를 청산하고, 봉건적인 정치 경제제도를 확립 발전시키기 위해서, "변법(變法)"을 통하여 구귀족의 정치에 대한 전횡을 타파하고 관료정치로써 귀족정치를 대체하여 국가권력을 봉건군주에게 집중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강력한 제도와 법령을 공포해서 전국의 모든 사상을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以法治國)"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강력하게 실행하였던 이러한 정치가들의 사상 이론과 실천은 각종 사조(思潮)가 격렬하게 경쟁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의 주장은 "법치(法治)"를 핵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법가(法家)"라고 일컬어진다.
2. 법가의 인물
한비
한비(韓非, 약 BC280~BC233)는 한비자(韓非子)라고 존칭되기도 하는데, 그는 원래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순자(荀子)의 제자였다. 순자와 전기 법가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한비는 여러 차례 한나라 국왕에게 변법(變法)을 건의하였지만 끝내 한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저술에 전념하여 자기의 법가이론 사상을 정리 논술하였다. 후에 진시황(秦始皇)은 한비의 저작을 보고 매우 찬탄하여 그를 진(秦)나라로 불렀다. 최후에는 진나라 내부의 모순으로 인하여 한비 자신은 진나라의 대신 이사(李斯)의 모함을 받았지만, 한비의 학설은 진시황에 의해 받아들여져 진시황이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한비의 학설은 먼저 천명(天命)을 반대한 순자의 사상 기초 위에서 노자사상 중의 변증법 요소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천명(天命)과 귀신을 부정하고 사람의 역량을 숭상하여 사물의 객관적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비는 국가의 흥망이란 역량의 강약에 의한 결과이며 천명 귀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일찍이 조(趙)나라가 연(燕)나라를 침공한 사실을 예로 들어 당시의 복괘설(卜卦說)에 의하면 조(趙)나라는 대길(大吉)하여 조나라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결과는 조나라의 패배로 끝났으니 이것은 귀신이 결코 영험한 것이 아니며 귀신을 믿는 것은 쇠망의 상징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고 지적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