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07.28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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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지하와 김지하의 시에 대하여.
목차
1. 김지하 소개
2. 김지하의 작품세계
3. 시 소개
4. 맺음말
본문내용
1. 김지하 소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본명은 영일이며, 지하는 필명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원주중학교 재학 중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주교와 인연을 맺은 뒤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가한 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항만의 인부나 광부 등으로 일하며 도피생활을 하였다.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 <저녁 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 되었고, 같은 달 2년 동안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복학해 이듬해부터 전투적인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 총연합회’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체포되어 4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난 뒤 1966년 8월, 7년 6개월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번역과 학생연극에 참여하는 한편, 1969년 11월 시 전문지 《시인》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저항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오적>을 발표하면서 단숨에 박정희 군사 독재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으며, 김지하는 이때 ‘<오적>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으나 국내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1970년 12월 첫 시집 《황토》를 발표하였다. 1971년 이후에는 천주교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계속 저항시 발표 및 저항운동에 전념하면서 연행과 석방, 도피 생활을 거듭하던 중 1974년 4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2년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간되었으며 1984년을 전후해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 등의 독자적인 사상에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참고 자료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2
김지하, 『생명』 솔, 1992
윤구병ㆍ임헌영 外,『김지하 - 그의 문학과 사상』, 도서출판 세계, 1984.
홍용희,『김지하 문학 연구』,시와시학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