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 군도제일의 한문 및 한글 번역
- 최초 등록일
- 2008.08.14
- 최종 저작일
- 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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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唐) 태종이 신하와 더불어 정사를 논한 것 중 정치에 대한 중요한 문답을 오긍(吳兢:670~749)이 정리한 책.
10권 40편.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627~649)이다. 〈태종실록〉에서 재료를 뽑아 사료로 이용했지만 역사서라기보다는 정치교과서로 당의 중기 이후의 제왕들이 많이 읽었다. 내용은 권1 논군도(論君道)·논정체(論政體), 권2 논임현(論任賢)·논구간(論求諫)·논납간(論納諫), 권3 논군신감계(論君臣鑑戒)·논택관(論擇官)·논봉건(論封建), 권4 논태자제왕정분(論太子諸王定分)·논존경사부(論尊敬師傅)·논경계태자(論敬戒太子)·논규간태자(論規諫太子), 권5 논인의(論仁義)·논충의(論忠義)·논효우(論孝友)·논공평(論公平)·논성신(論誠信), 권6 논검약(論儉約)·논겸양(論謙讓)·논인측(論仁惻)·신소호(愼所好)·신언어(愼言語)·두참사(杜讒邪)·논회과(論悔過)·논사종(論奢縱)·논탐비(論貪鄙), 권7 숭유학(崇儒學)·논문사(論文史)·논예악(論禮樂), 권8 논무농(論務農)·논형법(論刑法)·논사령(論赦令)·논공부(論貢賦)·변흥망(辯興亡), 권9 의정벌(議征伐)·의안변(議安邊), 권10 논행행(論行幸)·논전렵(論k獵)·논재상(論災祥)·논신종(論愼終) 등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사부총간속편 四部叢刊續編〉에 수록되어 있고 단행본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치(聖治)를 구현하는 전단계의 정치지침서와 같은 평가를 받아 널리 읽혀졌으며, 조선초에는 경연에서도 자주 강론되었고 역과(譯科)·몽학(蒙學)·사자(寫字)의 교본으로 쓰이기도 했다. 사림정치의 전개에 따라 한동안 배격되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까지 널리 읽혀 정치사상이나 제도정비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詩》云:‘先人有言,詢於芻蕘。’
시경에 말하길 선대 사람의 말에 나무꾼에게도 자세히 물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昔唐、虞之理,辟四門,明四目,達四聰。
예전에 당나라와 우나라의 사람은 4방의 문을 열고 4방의 눈을 밝히며 4방의 총명함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是以聖無不照,故共、鯀之徒,不能塞也;
그래서 성인이 비추지 않음이 없으므로 공공과 곤의 무리도 막지 못했습니다.
靖言庸回,不能惑也。
편안한 말과 용렬한 돌림도 의혹하지 못합니다.
秦二世則隱藏其身,捐隔疏賤而偏信趙高,及天下潰叛,不得聞也。
진나라 2세황제(胡亥)가 몸을 감추어 숨김에 버리고 간격에 두어 소원하고 천하게 여기며 오로지 환관 조고만 믿어서 천하를 무너지고 반란하게 하니 듣지 못함입니다.
梁武帝偏信朱異,而侯景舉兵向闕,竟不得知也。
양나라 무제가 치우쳐 주이만 믿고, 후경이 병사를 일으켜 대궐에 향하여도 마침내 알지 못했습니다.
隋煬帝偏信虞世基,而諸賊攻城剽邑,亦不得知也。
수나라 양제는 치우쳐 우세기를 믿어서 여러 적이 도성을 공격하고 읍을 노략질하여도 또한 알지 못했다.
是故人君兼聽納下,則貴臣不得壅蔽,而下情必得上通也。”
그래서 옛 임금은 아랫사람의 말을 들어 들이면 귀족의 신하라도 백성의 말을 막을 수 없으니 백성의 실정을 반드시 위로 통하게 됩니다.
太宗甚善其言。
태종은 그 말을 매우 좋게 여겼다.
貞觀十年,太宗謂侍臣曰:
정관 10년에 태종이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帝王之業,草創與守成孰難?”
제왕의 업에 창업과 수성중에 어떤것이 어렵습니까?
尚書左仆射房玄齡對曰:
상서 좌부야 방현령이 대답하였다.
“天地草昧,群雄競起,攻破乃降,戰勝乃克。由此言之,草創爲難。”
천지의 어두움에 여러 영웅이 다투어 일어나며 공격하여 깨뜨려야 항복하며 전쟁에서 이겨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말하면 창업이 어렵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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