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부, 만파식적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09.04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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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집사부, 만파식적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집사부
만파식적
본문내용
집사부
1.국가의 기밀과 서정(庶政)을 관장하던 최고의 행정 기관이었다. 장관인 중시(中侍: 2~5등관)와 전대등(典大等: 6~11등관)·대사(大舍: 11~13등관)·사지(舍知: 12~13등관) 각 1명과 사(史: 12~17등관) 14명을 두었다.
2.신라 최고의 관부(官府)인 집사부가 왕권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들어갔다는 것은 650년대에 이르러 귀족연합세력이 퇴조하고 왕권이 강화·확립되었음을 나타낸다. 829년(흥덕왕 4)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쳤다.
만파식적
1.일종의 가로피리로,「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擧動)하였다.
2.이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한다. 대금의 기원을 이 만파식적에 두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이전에 삼죽(三竹)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