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부인과 관련된 논쟁과 그시대 여성에 대한 시각
- 최초 등록일
- 2008.09.09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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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성학에서 자유부인에 대한 논쟁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상황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여러가지 문화와
기사와 내용 그리고 자유부인소설과 영화를 기본에 놓고서
전개해 나간 레포트 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책갈피 속의 오늘]1954년 소설 ‘자유부인’ 논쟁
1. 1. 1. 자유부인 당시 남한의 모습
[춤]불륜의 대명사서 아름다운 일탈로 Shall we dance?
2. 자유부인을 둘러산 논쟁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S데리아 밑에서는 육십여 명의 남녀들이 아름다운 고기 떼처럼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인생의 향락과 정열의 발산… 관능적인 체취에 정신이 현혹해 오도록 대담무쌍한 애욕의 분방….’
1) 6.25전쟁 후 미망인 급증-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따른 가부장적 가족 전통 붕괴 우려
한국 전쟁 3년 간 남편을 잃거나 돌아오지 않아 홀로 가장 역할을 하는 여성들을 ‘전쟁 미망인’으로 불렀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957년 10월 남한의 미망인 수는 55만 5,022명이었고 이들의 부양가족 수는 91만 6273명에 달했습니다. 전쟁 미망인들은 부양가족과 자신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재혼을 하거나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망인들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지만 일부는 도시에 나가 장사 또는 양재, 직조, 제과 등의 직업기술을 익혔습니다. 1959년도 [합동 연감]엔 전쟁 미망인의 수효 격증에 따른 부녀문제를 우려하는 글이 있습니다. “이들은 30세 전후로서 다방, 미장원, 요리점 등의 영업에 진출했다. 남편이 없다는 점에서 일한 사교계에 자유롭게 진출했다. 여성의 사교계 진출, 양풍의 유입은 가정을 경시하고, 허영과 향락에 빠지는 자유부인을 대량으로 산출했다.” 또 기록에 따르면 주택까지 침투하여 번창하고 있는 사창에서 일하는 윤락여성의 8.2%가 ‘전쟁 미망인’이라는 조사도 보고되었습니다. 사회는 이들 ‘전쟁 미망인’의 ‘성적 타락과 방종’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2) 우리 사회 흔들리는 성 도덕과 혼미한 세태 반영 : 박인수 사건
해군 헌병 대위로 근무하던 박인수가 공무원을 사칭하여 1954년 4월부터 55년 6월까지 1년 남짓 기간 동안 70여명의 여성 농락한 사건. 충격적인 사실은 대상 여성이 70명이 넘는다는 것과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은 여대생이고 육체관계도 자발적으로 갖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미용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는 처녀가 아니었다는 박인수의 주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부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 며 박인수의 혼인 빙자간음죄는 무죄로 판결(공무원 사칭만 유죄 인정)되었습니다. 여성의 정조성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사회적 비난에 법도 한 몫 보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 흔들리는 성도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자유부인1 정비석| 고려원| 1996.05.01
자유부인2 정비석| 고려원| 1996.05.01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07.09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07.09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3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