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유허비
- 최초 등록일
- 2008.10.13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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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팽년 유허비를 직접 답사하고. 유허비문의 오자를 찾아 지적하였습니다.
뿐 아니라 그 실태와 답사 후 느낀 점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차
Ⅰ. 취금헌 박팽년은 누구인가?
Ⅱ. 박팽년이 세거하였던 곳은 어디인가?
Ⅲ. 박팽년 유허비는 무엇인가?
Ⅳ. 박팽년유허비각 `장절정‘은 무엇인가?
Ⅴ. 유허비의 번역문에 대한 오류
Ⅵ. 박팽년의 절의정신
Ⅶ. 답사를 다녀와서 마치면서 느낀점
Ⅷ. 참고자료
본문내용
`대전충남의 문화유적답사` 박팽년의 절의정신을 찾아
충청도를 칭하여 흔히 충절의 고장이라고 한다. 조선의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충청도가 이렇게 충절의 고장이라고 불리우게 된 데는 박팽년의 절행에서 찾을 수 있다. 사육신의거는 한국절의정신의 표상이 되는 역사적 사실인데 이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취금헌 박팽년이다. 박팽년은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고장, 대전에서 세거하였던 인물로써 그를 추모하는 비가 그가 거주하였던 곳에 세워져 현재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나는 이번 답사지를 ‘박팽년 유허비’로 정하면서 박팽년이 어떤 인물이며,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돌이켜보고자 한다.
Ⅰ. 취금헌 박팽년은 누구인가?
박팽년 [朴彭年, 1417(태종17)∼1456(세조2). 조선 초기의 학자·충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이다. 1417년(태종 17) 회덕현 흥룡촌 왕댓벌에서 태어났다.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황보인 ·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을 보필했다.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붕어했는데,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1455년(세조1)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 김질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아들 3형제도 사형 당하였다.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1691년(숙종 17)에 명예가 회복된 후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로 벼슬을 높여 주었다. 그리고 시호는 그의 높은 절의를 가리켜 ‘충정(忠正)’이라 붙였다 한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글씨에 「취금헌천자문」이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참고 자료
․ 순천박씨충정공파세보, 회덕향교지
․ 대전직할시,《문화유적총람》 (1992)
․ 대전 동구문화원 [http://www.dgcc.or.kr/sub8_1.htm]
․ 대전광역시향촌사료관 [http://museum.metro.daejeon.kr/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