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고려의 건국과정과 태조의 왕권강화책
- 최초 등록일
- 2008.10.27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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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말여초의 시대상과 고려의 건국, 고려 건국 이후의 태조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관한 글 입니다.
목차
Ⅰ. 序 論
Ⅱ. 나말여초의 사회혼란과 고려의 건국
1. 골품제의 모순 심화
1) 왕위계승을 둘러 싼 진골 내부의 갈등
2) 6두품세력의 사회개혁 요구
2. 지방세력의 성장과 선종의 등장
1) 호족의 대두
2) 농민항쟁의 전개
3) 선종의 등장
3. 후삼국의 성립과 고려의 건국
1) 후백제의 성립
2) 후고구려의 성립
3)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Ⅲ. 왕건의 왕권강화책
1. 혼인정책
2. 사성정책
3.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
4. 서경제도
Ⅳ. 結 論
본문내용
Ⅰ. 序 論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라는 새로운 통일왕조를 확립한 것은 한국사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후삼국의 분립기가 매우 심각한 민족분열의 시기였고, 그것을 극복하고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한 이래 우리민족은 단일한 국가, 단일한 문화, 단일한 역사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자명해진다.
통일신라시대가 약200년 간 지속되다가 후백제의 건국으로 시작된 후삼국의 분열과 대립은 왕건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약 45년 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을 단순한 내란기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각각 강력한 군사력과 조직을 지닌 국가로 존립하면서 한반도의 서남부와 중북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분열을 지양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기는 후백제의 견훤이나 후고구려의 궁예나 왕건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나말 여초의 왕조교체기에 있어서 정치 사회적 변동을 주도한 세력은 주지하던 바와 같이 호족이었다. 신라 하대에 중앙 진골귀족들의 상쟁으로 정치활동이 약화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자, 토착적인 촌주층의 성장이 두드러지고, 또 지방으로 밀려난 중앙귀족 출신자나 군진세력이 점차 지방호족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태조에게 있어서 초미의 과제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즉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는 호족들을 회유하고 나아가서는 이들을 압박하여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고려는 처음부터 지방호족세력을 근본적으로 해체시켜 단일국가 체제를 이룩한 것이 아니고 지방호족과의 연합체제 위에서 성립한 호족연합적인 국가였다. 초기에는 중앙관료의 지위를 차지한 호족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근원적인 지방의 세력기반은 여전히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으며 각자 별개의 통치조직과 사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초의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는 이들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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