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 최초 등록일
- 2008.11.01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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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50년대에서 지난 2005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진행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의 과정 및 배경에 대해 알아보는 report입니다.
목차
1. 1차 교과서 파동
2. 2차 교과서 파동
3. 3차 교과서 파동
① 3차 교과서 파동 진행 과정
② 일본 역사 교과서(扶桑社) 왜곡 내용 및 한국의 수정요구, 일본 정부의 답변
4. 4차 교과서 파동
5. 역사교과서 왜곡의 국내외적 배경
6. 맺음말
본문내용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연원(淵源)은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5년 민주당(자민당의 전신)은 총선거에서 ‘자주헌법 제정’·‘자위군창설’·‘국정교과서 통일’을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를 거머쥔 후 공격의 포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교과 지도를 통한 역사의 왜곡은 보다 이전의 1951년의 「학습지도요령(學習指導要領)」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학습지도요령」이란 교육서 검정의 기준으로 문부성이 공포한 것으로, 1947년판에서 ‘일본의 중국침략(中國侵略)’이란 구문이 1951년판에서는 ‘일본의 대륙진출(大陸進出)’ 으로 개변(改變)된 것이 이에 해당한다.
1955년 민주당(자민당의 전신)은 교과서의 ‘침략’ 기술을 문제 삼는 ‘1차 교과서 공격’에 착수했으며, ‘우려할 교과서 문제’ 1~3집을 발표하여 검정에 합격한 역사 교과서를 비방공격하기 시작했다. 1955년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합동(자유민주당 결성)으로 교과서제도의 개악(改惡)이 단숨에 진행되었다. 1956년 문부성은 교과서조사관제도를 신설하고 교과용도서검정조사심의회의 위원을 이전의 2배인 100명으로 증원(增員)하여 검정을 강화했다. 1957년 검정에서는 소학교의 1/3이 불합격되고, 중학·고교의 사회과교과서 8종이 불합격되었다. 또한 전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 전국연구집회의 강사를 했던 대학교수 등이 편집한 교과서 모두 불합격 처리되었다.
이에 대한 반격은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1913~2002) 도쿄교육대 교수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이 집필한 교과서에 대한 문부성의 검정이 부당하다며 검정 불합격처분취소 등을 요구하는 두 차례의 소송을 65년과 67년에 제기하였고, 이를 계기로 성장하기 시작한 일본의 교사·학부모·시민·연구자·문화인·출판노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가 역사의 기억을 왜곡하려는 세력들에 대한 반격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에 따라 1970년 ‘검정 불합격 처분 취소’라는 승소 판결로 귀결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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