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의 묘제 또는 무덤에 관하여(지석묘-고인돌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08.11.12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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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동기 시대의 묘제의 종류와 특징
목차
머리말
Ⅰ.청동기 시대 묘제의 종류
- 적석총,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지석묘
Ⅱ.고인돌(지석묘)의 특징
1.거석문화와 고인돌
2.고인돌의 개념 및 분포
3.고인돌의 종류
4.고인돌의 세부구조
5.고인돌의 축조과정
6.우리나라의 고인돌
*요령지역의 고인돌(석붕石棚)과 북한의 고인돌
7.고인돌 출토유물
8.그 밖의 고인돌의 특징
Ⅲ. 고인돌로 본 청동기 시대
1.청동기의 보급과 계급 발생
2.청동기 사회의 모습 추론
맺음말
- 앞으로의 지석묘 연구 방향
본문내용
Ⅰ.청동기 시대의 묘제의 종류
1.적석총(積石塚, 돌무지 무덤)
돌무지무덤은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대신 돌을 쌍은 것으로 토광묘와 함께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묘제이다. 특히 춥고 바람이 강한 시베리아 초원 지대에서 널리 보급되어 바이칼 지방에서는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돌무지무덤이 시베리아에서 남하해온 전통이라 믿어진다. 지금 우리나라 선사 시대의 돌무지무덤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극히 드무나, 냇돌이 많은 강가에서 살던 신석기 시대의 주민들은 토광묘보다 돌무지무덤을 더 많이 건조하였을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또한 이 신석기시대 돌무지무덤의 전통이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를 거쳐 역사 시대로 연결되고 경주 신라 고분의 적석 목곽분(積石 木鄕墳)에까지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기도 부천군 시도(矢島)에서 발견된 즐문토기 후기의 돌무지무덤은 땅을 타원형으로 약간 파고 그 위에 돌을 덮은 것으로 뼈는 없었으나 숯이 많이 나왔고, 적석부의 크기는 불과 20cm 정도에 타원형이어서 사람을 묻었다 해도 발을 구부린 굴장(屈莊)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돌무지무덤은 춘천 소양강변에 남아있다. 춘천 교외의 천전리(泉田里)에 있는 3기의 돌무지무덤은 모두 중심부에 두 세 개의 석곽(石槨)이나 석관(石橋)을 두고 그 전체를 큼직한 석괴로 덮은 것이며, 석관은 판석을 짜서 만들었으나 석곽은 괴석을 쌓아서 만든 것이고 모두 큰 판석 한 장을 따로 뚜껑으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부장품으로는 마제 석촉, 토기 파편 등이 나왔다. 이들 석곽은 모두 동서 방향을 장축(張軸)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을 것으로 보이며, 부장품으로는 숯, 마제석촉, 무문토기 등이 나오고 있다. 또 석곽의 크기는 길이가 1.2-1.4m 정도이고, 석관은 길이가 불과 40cm정도이어서 성인을 신전장하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역시 몸을 구부려서 묻은 굴장이 아니면 시체를 일단 묻거나 지상에 방치했다가 뼈만을 추려서 매장하는 이중장(二重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탐구당, 2003).
이영문, [한국 지석묘 사회 연구](학연문화사, 2004)
이청규 외, [계층 사회와 지배자의 출현] (사회평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