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의 학술과 문화
- 최초 등록일
- 2008.11.22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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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대에는 학술적으로는 왕양명에 의해서 양명학이 꽃 피웠던 시기이고, 다양한 종교와 속의 문화 등으로 인해서 문화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이다.
목차
Ⅰ. 명 전기의 사상(思想)과 학문(學問)
Ⅱ. 양명학(暘明學)
Ⅲ. 경세학(經世學)의 발달
Ⅳ. 명대의 종교(宗敎)
Ⅴ. 속(俗)의 문화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명 전기의 사상(思想)과 학문(學問)
⑴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명조 전기에는 몽고족의 풍습을 배제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등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유학 가운데에도 체제유지를 위한 주자학(朱子學)이 관학화하여 학문과 사상이 위축되어 있었다. 태조(太祖)인 홍무제(洪武帝)는 몽골의 오랜 지배 하에서 변질된 한문화의 부흥에 주력, 당(唐)ㆍ송(宋) 문화로 환원하려는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정책을 취하였다. 이로 인해 명 초(初)의 문화정책은 중국 전통문화의 재생과 부흥을 중심으로 하였고 이 때문에 문화계의 창의력이 결여되었다. 또한 주자학(朱子學)을 국가 통치의 기본으로 수용-태조의 황제권 강화에 있어 군주전제(君主專制) 체제를 합리화하는데 주자학이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육유(六喩) 선포를 선포하여 주자학의 교육지침을 따르도록 하였다. 유기(劉基), 송렴(宋濂), 방효유(方孝孺) 등의 철저한 주자학 신봉자들이 태조에 주변에 있으면서 이러한 방향을 마련하였다. 남경의 국자학 설치 및 주자학이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선정함을 통해 주자학이 관학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⑵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주자의 학설에 입각한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영락대전(永樂大全)』과 같은 국가적 대사업 추진을 통해 주자학에 의한 사상의 통일 추진하였다. 과거시험또한 이들 책에 의한 해석으로 답을 쓰게 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이 획일화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상 기풍이 소멸함으로 군신의 의(義)가 절대화, 주자학의 리(理)만이 강조되었다. 한편 과거시험의 규격으로서 팔고문(八股文)을 제시하면서 사상의 통제가 심화되어 자유로운 사상의 표현을 봉쇄되었다. 사회적으로 관(官)과 학(學)의 유착이 일반화되며 주자학의 침체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로 새로운 사상계의 변화에 대한 바람이 양명학(陽明學)으로 가시화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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