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작가론-김시습
- 최초 등록일
- 2008.11.29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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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작가론-김시습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사상
2) 시
3)금오신화(金鰲新話)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국문학이나 고전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은 김시습이라는 이름을 안다. 그리고 그가 당대의 천재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은 김시습이 천재라는 것이다.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력은 그를 천재로 만들었지만, 성공한 정치가로는 만들지 않았다. 그의 가치관이 그의 재능을 문학안에 가두어 두었는 지도 모른다. 김시습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바라보았는 지에 대해 이번 발표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해볼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텍스트는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경주의 금오산에 정착하여 지은 한문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지은 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석실에 감추었다. 이런 측면에서 금오신화는 김시습의 가치관과 생각이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Ⅱ. 본론
1) 사상
김시습은 “시 말고는 즐길 것 없다[除詩無以娛,「 除悶六首」]”, “시 없이는 말 할 수 없다.[無詩語未能, 「夜吟」]"고 노래했듯이, 다른 무엇보다도 시재(詩才)가 뛰어났던 사람이다. 『매월당집』 23권 가운데 시집이 15권이나 되고, 수록된 시는 무려 2,200여 수에 이른다. 이렇게 김시습이 시를 많이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김시습은 조선 전기 양반 집단 자제 중에서 비교적 불우하게 성장한 편이다. 물론 그의 재능은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남달랐지만, 집안 자체에 여러 가지 악재가 많이 겹쳤었다. 특히 김시습이 무관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그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데 큰 악재로 작용하였다. 그 당시 조선 사회는 건국 초기의 패기가 엷어지고, 서서히 보수화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배경이 훌륭하지 않다면 중앙 정계에서 진출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일찍부터 알았는지 모르지만, 김시습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 김시습이 21살 되던 때 일어났던, 계유정난(癸酉靖難)은 김시습을 혼란에 빠뜨렸다. 김시습이 굳게 믿었던 유학적 명분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참고 자료
-류수(1963), 김시습 작품선집, 서울: 조선 문학예술 총 동맹 출판사
-이종건(2001), 한시가 있어 이야기가 있고, 서울: 새문사
-진경환 외(1998), 한국 고전문학 작가론, 서울: 소명 출판
-전병현․이지영(1998),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서울: 돌배게
-황패강 외(1999), 한국 문학 작가론2, 서울: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