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처용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를 중심으로 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처용가의 배경설화
2. 처용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1) 주술적 의미
2) 불교적 측면
3) 무속적 측면
4) 역사적, 사회적 측면
① 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견해
②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5) 종합적 해석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향가는 신라 시대에 생겨나 고려 때까지 이어진 노래로 현재 남아 전하는 것은 모두 25수이다. 그 중 ‘처용가’는 총 25수의 향가 중에서 가장 많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에 관한 논문도 많이 발표된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진 이론은 없는 상태이다. 우선 우리말이 아닌 향찰로 표기되어 그 구체적인 의미 해석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처용의 신분문제를 보더라도 호족의 후예나, 그 지방에 상륙한 이슬람 상인 등 역사적 실제 인물로 보기도 하고, 중이나 무당으로 파악하는 등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리하여 처용가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분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번 레포트에서는 처용가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가장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처용’의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처용가의 배경설화
처용설화는 「처용랑 망해사」조에 실려 있다. 흥미로움과 수수께끼 같은 난제를 겸하고 있는 이 조목은 관점에 따라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49대 헌강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웠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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