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과 문화운동론
- 최초 등록일
- 2008.12.07
- 최종 저작일
- 2008.12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본고는 `한국 근대사의 탐구`로 개설된 대학교 강의에서, 박찬승의 『한국 근대 정치사상사 연구』중, 제 3장을 요약하여 발표한 자료이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에 신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은 이전부터 실력양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으며 결국 `문화운동`이라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본 정리본은 저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분량이며, 약 140~150페이지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책의 내용에 대한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가 서두에 간략히 언급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별첨`이라는 목차에 본인이 직접 도식을 하였다. 또한 도식에 해당되는 페이지 수를 표기하였으며, 요약본의 내용에서 궁금해할만 한 핵심단어나 내용을 각주로 처리하였다.
아무쪼록, `문화운동`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이 자료가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목차
※ 서 설
1. ‘문화운동’ 대두의 배경
2. ‘문화운동론’의 논리
3. ‘문화운동론’의 내용과 ‘문화운동’
4. ‘문화운동’의 성격
5. 별첨
본문내용
※ 서 설
▷ 1910년대 주로 일본유학생 지식층들에 의해 이론화 과정을 거친 실력양성운동론은 1920년대 초 ‘문화운동’을 통해 실행과정에 들어갔다. 일제의 무단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그에 이은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다른 국가들의 혁명으로 고무된 조선의 신지식층들은 독립운동 전개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따라서 3 ․ 1운동을 수행했지만, 아직은 사회 진화론적 측면에서 약육강식의 법칙이 잔존한다고 인식하여 본래의 실력양성론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1920년대 초반, 이른바 ‘문화운동’이라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 ‘문화운동’ 대두의 배경
1) 3 ․ 1운동 이후 각종 외교운동의 좌절
(1)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구상한 독립운동 방법
° 강화회의와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의 독립을 지원해달라는 청원서 전달
° 일본정부에 독립의견서 제출
° 국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통치에 불복한다는 의사를 내외에 표시
° 각 지방에서의 선언문 낭독과 만세시위
⇒ 자본주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인한 실패
(2)그 밖의 독립운동 전개
° 1919년 국제연맹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
° 1920년 미국 하원의원단의 한국방문 시 독립만세 시위
° 조선이 주최한 환영회에 미국 초청
(미 의원단장의 거부, 의원단 일행 중 ‘헐스맨’만 참석)
(3) ‘自力에 의한 독립의식’필요성 자각
° 환영회에 방문한 헐스맨의 연설로 자극을 받은 조선 지식층들은 미국에 대해 기대
° 1921년 워싱턴회의 - 당초 조선 문제를 다뤄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미국 ․ 영국 ․
일본 간의 이익에 대한 논의들만 이루어짐.
⇒ 조선인들의 인식 전환 - 미국 또한 자국의 이익에만 힘쓰는 열강으로 간주
- 스스로의 힘을 키워 독립을 쟁취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
(후략)
참고 자료
박찬승, 「한국 근대 정치사상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2, pp.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