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금나라
- 최초 등록일
- 2008.12.08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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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진족의 금나라의 건국과 나라전체 구성
목차
1. 여진족의 기원
2.금나라의 성립배경과 대외관계
3.금대의 통치체제
4. 여진의 문화적 특징
본문내용
1. 여진족의 기원
동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으로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 ․ 당 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여진족은 크게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나누었다. 송화강을 경계로 서남쪽에 살면서 비교적 한화되고 수렵과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여진인을 개화된 민족이라 하여 중국에서는 熟女眞(숙여진)이라 불렀고, 두만강 북쪽에서 멀리 송화강, 흑룡강을 따라 현재의 길림성, 흑룡강성에 거주하는 여진인을 미개하다고 하여 生女眞(생여진)이라고 불렀다. 고려에서는 그냥 지역으로 분류하여 서여진, 동여진이라 불렀다.
2.금나라의 성립배경과 대외관계
핵리발의 차자였던 아골타는 요 천경 3년 (1113) 10월 그의 형 오아속(康宗)이 죽자 행여직부의 도발극렬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에는 요로부터 생여직부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생여직부절도사에 오른 태조는 아골타는 주변 여진 제부 세력을 통합하면서 완안부 세력의 내부적 결속을 공고히 하여 국력을 배가시키는데 전념하였다. 그런데 당시 생여진 사회에서는 에 대한 반감의 기운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금사 태조 2년의 사료에 보면
『이전부터 요(遼)는 매년 사신을 보내어 바닷가에서 나는 명응(名鷹) 해동청(海東靑)을 구하였다. 드나드는 길에 遼의 사자들이 탐욕을 부리고 방종하며 요구함이 끝이 없었으므로 公私(공사)가 모두 이를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었다. 康宗은 일찍이 阿疎를 돌려보내지 않음을 구실로 점차 요 사신(浦鷹使,포응사)들을 거절하였다. 태조도 절도사직을 승계하매 역시 浦家奴(포가노)를 파견하여 阿疎(아소)를 색출케 하였다. 그런고로 항상 이 두 가지가 구실이 되었으며, 遼를 멸한 이후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라고 적고 있는데, 당시 생여진 사회에 일어난 반요의 원인이 遼로부터 파견되는 포응사의 횡포가 지나쳐서 민관이 모두 심한 괴로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며, 완안부의 적이었던 아소의 송환 문제 또한 요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東洋史槪論』, 신채식, 삼영사, 2007
『전쟁과역사 2』, 임용한, 해안, 2004
「金 建國 前後期의 遼 ․ 金 關係」, 이성호, 2003
「金代 猛安謀克地의 補强政策」, 이동식,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