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부자 홍순언
- 최초 등록일
- 2009.01.02
- 최종 저작일
-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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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역관이었던 홍순언에대한 리포트입니다 ~
A+받은 과목입니다
여러 문헌에 나타난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목차
1. 여는말
2. 홍순언에 관한 기록
(1) 성호사설
(2)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4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3) 비변사
(4)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5) 조선왕조실록
3. 맺는말
본문내용
1. 여는말
홍순언(洪純彦)은 16세기 후반 조선 선조 때의 역관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매우 활달한 성품에 의기가 있었으며 선조 때 명나라에 갔다가 청루에 나온 미인을 구해주고 돌아와서 선조 17년(1584)에 다시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 황정욱을 따라갔다가 예부시랑 석성의 계실(繼室)이 된 그 여인을 만나 종계변무의 어려운 일도 바로 잡고 돌아왔다.
그 후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함에 마침 병부상서로 있던 석성은 많은 원군을 큰 도움을 주었다. 석성의 아리따운 계실 부인이 홍순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남모르는 노력이 조선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었다. 이 무렵 홍순언은 아무리 난제라도 중국의 대접을 받아가며 교섭을 했다.
홍순언은 그 후에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었고 당릉군(唐陵君)에 훈봉되었으며 그 손자 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2. 홍순언에 관한 기록
(1) 성호사설
홍순언에 관한 기록은 성호사설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홍순언이 명에 갔을 때에 그는 청루에서 한 여인을 구하였는데, 그것으로 인해 홍순언은 귀국한 뒤 하룻밤 객기로 거금을 내다버린 허랑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다시는 연행 걸음에 데리고 가려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 조선왕조에서는 명나라 역사책에 태조 이성계의 조장이 잘못 적힌 ‘종계변무’라는 외교문제가 있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전후 10차례의 사신을 명에 보냈으나, 아무런 명쾌한 답을 얻을수 없었다. 선조는 크게 노하여 엄한 전교를 내렸기를,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청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오면 수석 통역관한 사람을 목 베리라.” 하였다.그러자 모든 역관이 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이때 홍순언이 다시 압록강을 건널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때 예부시랑 석성의 계실이 된 그 여인이 홍순언을 의부(義父)로 대접하니, 석성도 홍순언을 장인처럼 공경하며 종계변무도 잘 해결하고 그 후 왜란 때의 원군 요청에도 힘써주었다.
ㄱ. 제9권 인사문(人事門)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한국역사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국사편찬위원회(http://www.history.go.kr/)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
《한국사 29, 30》, 국사편찬위원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