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치제의 친정과 주접제도
- 최초 등록일
- 2009.02.19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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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순치제의 친정과 주접제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순치제의 중앙집권정치
1) 숙부 도르곤과 순치제의 사이
2) 도르곤 사후 순치친정
3) 친정체제의 성립
4) 중앙정치조직
2. 순치제의 재정정치
1) 奏銷制度
2) 考成法 강화
3. 奏接制度와 軍機處
1) 奏摺政治
2) 軍機處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순치제(順治帝, 1638~1661)의 중앙집권정치
순치7년 섭정왕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이 죽자 도르곤의 섭정이 끝이 나고, 드디어 소년 황제 순치의 친정이 시작된다.(순치 8년, 1651) 7년간의 도르곤의 대권독식은 상대적으로 순치에게는 추종하는 旗主를 제외하고는 팔기왕공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순치 친정 이후 청의 통치체제가 황제를 중심으로 회복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청초의 정치형태는 종실 가운데 누가 얼마만큼의 여러 旗의 旗主權을 확보하는가에 따라 권력을 을 장악할 수 있었다. 순치 또한 친정을 시작한 후 가장 먼저 도르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친왕과 양황기의 旗人들이 도르곤의 정백기파를 숙청한 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전에 양황기만을 통솔하던 순치제는 이제 정백기까지 장악하고 친정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를 정비해 간다. 제도상에 보이는 청조의 황제지배체제는 중앙관제와 지방관제에서 잘 나타나는데 청의 중앙관제는 명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내용상에서 황제권의 강화에 뚜렷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청조는 입관 이전부터 명조의 관료를 적극 회유하고 등용하였다. 항복해온 관원들에 대하여는 공적이나 대동하고 온 무리의 수에 따라 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였다. 도르곤은 북경에 수도를 정한 이후 명의 문무 관료와 대다수의 지방 관료에게 복직을 권유하고 그들이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 줌으로써 혼란을 예방하였다.
1) 숙부 도르곤과 순치제의 사이
도르곤과 순치제는 다분히 이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숙부의 지지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황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숙부의 존재로 인해 섭정 당하는 운명은 면할 길이 없었고, 황제로서도 유명무실 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자료
˚ 이민호, 『淸初 順治 親政期의 財政危機와 그 對策』, 慶熙史學會, 2001
˚ 조재덕, 『順治時期 中央權力의 性格 : 八旗王公의 權力鬪爭을 中心으로』, 동양학연구학회, 1997
˚ 옌 총니엔, 『대청제국 12 군주열선 상』, 산수야, 2007
˚ 임계순, 『淸史』, 신서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