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향교와 기장향교 답사 보고
- 최초 등록일
- 2009.03.18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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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교는 고려조에 설립되었으나 무신집권기와 몽고와 왜의 침입 등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에 지방관과 유생들의 노력에 의해 점점 그 기능을 회복하고 숫자도 증가하였다. 그뒤 조선이 건국되면서 향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즉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을 모든 백성에게 보급시키기 위한 ‘1읍 1교’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다시 전국 329개 고을에 향교가 건립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향교들은 그 군현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즉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폐지되었고, 새로운 군현이 생기면 더불어 향교도 세워졌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향교 대부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는 향교는 남한에 231개가 있으며, 북한에도 1950년 이전까지 많은 수가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목차
1. 향 교 의 기 원
2. 건물의 구성과 배치 형식
3. 직제와 운영
4. 향교의 경제적 기반
5. 향교 건축물의 특징
6. 향교의 기능
7. 향교의 의의
본문내용
1) 향교의 입지
향교는 관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관아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향교가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향교 건물이 없더라도 가정집에서 스승을 두고 학생을 가르친 경우도 있으며, 관아나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많은 사찰이 헐렸는데, 이때 사찰의 재목을 향교 짓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2) 배향 공간
선현에 제사 지내는 배향 공간에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그 앞 좌위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던 건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4성과 공자의 제자 등도 함께 봉안하게 되었다. 즉 대성전에는 공자뿐 아니라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네 명의 성인, 공자의 수제자 열 명,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등 송나라 6현의 위패를 봉안한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문하 72현, 한, 당, 송나라의 22현, 우리나라의 18현을 모신다.
향교는 기본적으로 윤리 규범을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에 향교 건물의 건축 양식에서도 위계질서를 찾아볼 수 있다. 대성전과 동, 서무는 명칭에서부터 ‘전’과 ‘무’의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다. 즉 5성을 모신 대성전을 대궐을 뜻하는 전의 개념을, 제현과 우리나라의 18현을 모시는 동, 서무는 행랑을 뜻하는 무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