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티움해전의 옥타비우스 승리
- 최초 등록일
- 2009.03.28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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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콜로키움임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토론강의 시간에 발표했던 자료입니다.
악티움해전에 대한 설명과 옥타비아누스의 업적 그리고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지 않았다면 과연 로마제국이 있었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A+받았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악티움 해전(기원전31년) 이란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로마의 패권을 두고 겨룬 해전이다. 우수한 육상전력과 군자금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전으로 옥타비아누스를 상대했으며, 전투에 돌입한 이후에도 지휘관인 안토니우스는 도망치는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전투자체를 내팽게 침으로써 패배를 불렀다. 이후에도 건재했던 육상전력을 활용하지 않고 계속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른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로 죽음을 맞게 된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고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정책으로 로마제국이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이란 공화정기에 있던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부터 제정기로 들어가면서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을 말한다.
나는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지 않았다면 로마제국은 없다고 생각한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세계를 제패한 기원전 29년은 로마사에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기에 알맞은 시점이었다.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나이는 겨우 31세였지만, 카이사르의 모든 유산을 상속한 절대군주로 등장하였다. 그는 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더구나 왕이라는 단어가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민중은 질서, 평화, 안전, 훌륭한 행정, 통화와 저축의 안정을 원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민중의 이러한 심정을 제도를 통해서 보장하려고 노력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대략 50만에 이르는 거대한 군대의 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군인의 수를 20만으로 감축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군대의 총사령관을 가리키는 순수한 군대 용어인 임페라토르로 명명하였다. 시민들이 정부에 진 부채를 무효화하였으며,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구상하였던 모델에 기초하여, 행정 부문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재편성하는 대개혁을 완수하고자 하였다. 이런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고안한 새롭고 독창적인 관료체제가 필요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중심으로 실무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종의 내각을 구성하였다.
참고 자료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종민 역)『만약에2』세종연구원, 2008
신선희,김상엽, 『이야기그리스로마사』 청아출판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