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를 겸하였다. 1924년까지 4년 동안 물산장려회, 관서체육회 등을 조직했고, 한편으로는 산정현교회 장로로 눈부신 활동을 했다. ... 그는 40세에 평양 YMCA 총무에 취임하여 50세가 되기까지 11년 동안 무보수로 봉사했다. ... 그는 일본 유학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장로교와 감리교를 연합시켜 재일 조선인 교회를 설립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스스로 성경을 맡아서 가르쳤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연합시켜 재일 조 평양으로 나와 기독청년회 총무로 있으면서 숭실학교 강사를 겸하였다. 1924년까지 4년 동안 물산장려회, 관서체육회 등을 조직했고, 한편으로는 산정현교회 ...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고당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양 성안의 창녕 조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 그는 평양의 창덕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하였지만 부친의 지병으로 인하여, 곧 다시 만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만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14살(?)이었다.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22년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 재학중에는 동경에서 김정식, 백남훈과 함께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의 조선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 방학이 되어 향리에 귀향할 때면 연락선이 부산에 닿는 즉시로 구두와 모자를 벗어 팽개치고, 한복에 갓, 감투를 쓰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풀려나 다시 오산 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평양 기독교 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 물산장려운동의 전개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 김동원(金東元) 등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든 뒤,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조선 물산을 쓰자'는 운동이 서울과 ... 이 운동은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김동원 등 기독교계와 교육계 유지 70명의 발기로 시작된 이후,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서울에서 창립되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