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의리라는 부친(영조)를 옭아맨 노론의 올가미를 포착했고 당색이 뚜렷한 소신 파들을 영도하는 준론탕평을 구상하게 된다.이렇듯 젊은 시절 제왕의 자질이 다분했던 사도세자 이었으나 ... 부왕 영조가 힘겹게 이끌어오는 탕평책은 한계가 보였다. ... 영조는 비록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태생적 한계상 노론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분명히 노론이 선택했기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
노론 준론 兪拓基를 우상에 임명한지 4개월만에 그의 건의를 받아 실시하였는데, 당시 소론 준론의 영수 李光佐가 영상으로 있을 때였다. ... 곧 소론 준론 이광좌를 보호하는 동시에 소론의 손으로 심임옥사의 처분을 뒤집으려 했던 것이었다. 이로써 이제까지 정국을 혼란시켰던 주요 쟁점이 일단 없어졌다. ... 따라서 탕평책을 다시 추진시키기 위해서는 전술한 탕평기반의 강화와 함께 탕평의 정치명분으로서 경신처분에 의해 제기된 壬寅三手獄에 대한 反案문제를 반드시 확정지어야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