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척화주의자들은 이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유가적 사대명분론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히는 역적이 하는 짓거리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 그런데도 입만은 살아서 척화파 김상헌 등과 주화파 최명길 등은 두 패로 갈라져 강화냐, 싸움이냐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화의를 얻기 위해 홍서봉, 이경직 등의 대신이 적진으로 ... 그리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국서를 물리치고 청의 사신을 만나지 않음은 물론, 척화주의자들은 용골대 일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용골대 일행은 허겁지겁 도망쳤다.
병자호란 이후 실시한 산성무과에서 천인들의 무과급제의 폭은 상당히 확대되었는데, 이 같은 현상은 당시 척화파가 정계에서 배제되고 주화파가 정국을 주도함으로써 반주자학적 실리론이 대두하는 ... 이는 인조반정 이후부터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기초한 상하적 신분질서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이괄의 난·정묘호란 때에 무과급제를 통한 천인의 신분상승은 실현되지 않았다. ... 따라서 병자호란부터 숭명반청사상을 정치이념으로 한 반정공신 세력이 약화되고 반주자학적 실리론과 사회변동에 부응한 현실적 체제개혁론이 전개되면서 천인들이 무과에 응시할 수 있는 여건이
이와같은 청나라 측의 무리한 요구는 가뜩이나 척화로 무르익고 있는 조선조정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후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 주화파(主和波)는 주전파(主前波)와의 여러차례 논쟁을 거듭하였으나, 주전파 역시 이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獻), 이조참판 정온(鄭瘟) 등의 반대에도
그리하여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때는 사림학파인 "김상헌"을 대표하는 척화:斥和=(화회를반대함)론과 관학파인 "최명길"을 대표하는 주화:主和=(화회를주장함)론과의 대립이 있었다 ... 그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이기(理氣) 론리(論理)의 학설론쟁(學說論爭)이 심화(深化)된 가운데 성리학 재건의 중심체제(中心體制)로서 선도적 사림파 남인(南人)의 이론가(理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