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이라는 제목은 그 복잡한 역동의 시기를 함축한 비유적 표현이자, 당대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체감하고 대응했는지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필자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새 국가 건설, 사회개혁을 둘러싼 열망이 끓어 넘치고, 이념 갈등과 생계 걱정이 맞부딪치던 70여 년 전...
2020년 1월, 사상 초유의 코로나 사태가 한국을 뒤덮었다. 하루에 백 단위로 확진자가 늘어날 때는 타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하였고 국민들 조차 한국의 대응 정책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최대한 이성적이고 냉철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서로에 대한 신뢰 하에서만 실효성을 지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혼란스러웠던 시기는 잠시,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불굴의 한국인’이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한반도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가 살아가는 방식은 늘 그랬다. 외환위기로 휘청거리던 시절에는 온 국민이 나랏빚을 갚기 위해 집안 깊숙이 숨겨뒀던 금붙이를 죄다 들고 나왔고, 유조선 사고로 바다가 온통 기름에 뒤덮였을 때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천 조각을 가지고 나와 모든 기름을 닦아냈다. 심지어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조차 전국과 세계로 흩어져 끊임없이 독립운동하며 해방을 향한 기대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해방 직후의 시기, 우리 민족은 외국 군대의 점령하에 제대로 개화하지 못한 채 분단이라는 아픔을 맥없이 받아들였다. 무슨 이유였을까? 조선인들에게 총칼을 겨누던 일본인들이 본토로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곧바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신탁통치의 장기화에 하염없이 무너진 것일까?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은 한국인들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미군정의 점령통치에 마땅한 대응을 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사회개혁을 향한 열망이 들끓어 오르던 시기, 해방과 점령의 모순적인 공존이 가능하게 된 배경과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이해관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파헤친다. 꽤나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8 ‧ 15 해방 직후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쉽게 이해되는 표제이다.
한 국가의 역사는 국가와 국가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오늘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친미 성향으로 분류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이러한 한국의 성향은 단순히 정부 지도층에서 나타나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인 전반에서 나타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자국중심주의적 대외정책으로 다른 동맹국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급락하는 와중에도 한국인들의 미국 호감도는 59%를 기록했다. 이는 조사 대상인 미국의 13개 동맹국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물론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과 한국인은 상당히 친미적인 태도를 오랜 기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과 한국인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한국과 미국은 한국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한 미국 박사 출신이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군은 한국의 편에서 참전했고 오늘날까지도 군사동맹을 이루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적 자본주의를 국가 주도형으로 수용하여 미국의 비호 아래 발전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한국과 한국인의 친미적 정체성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역사적인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가진 친미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미국의 의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이 냉전이라는 특수한 국제 정치적 배경을 토대로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미국은 한국을 점령했다. 미국은 미군정의 형태로 한반도 남부를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통치했으며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현재의 한국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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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용욱,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https://image4.happycampus.com/Production/thumb212/2022/08/31/data27471616-000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