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뜻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의 것을 포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것을 잃는 것. 종교적인 의미의 희생은 전자의 뜻에 더 가까우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희생은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어느 쪽으로 희생이라는 말을 사용하든 간에 이 점 만큼은 분명하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잃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 사람만이 희생을 할 수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이 가족이건, 자신의 신념이건, 목숨이건 말이다. 다만, 스스로 내려놓은 사람에게는 내려놓은 사람의 기쁨이 있을 것이고,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잃어버린 사람의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도 이렇게 놓고 보면 결과의 측면에서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곳이건 간에 자기를 버리는 것은 똑같다. 그것이 누구의 의지인가만이 차이를 만든다.
이 지점이 참으로 다행인 것은 희생의 대가가 목숨만 아니었다면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는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곳은 나의 흐름이 멈춘 곳이었다. 흐름이 멈춘 곳보다 낮은 곳은 있을 수 없다. 그곳은 나의 흐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이었다.”
그곳은 주인공 안요한이 장님이 된 후 목사의 길을 시작하기 전에 거지생활을 위해 흘러간 곳이다. 서울역, 그곳은 얼마나 낮고 높은 사연들이 모여들고 흩어지는 곳인가? 서울역은 얼마나 다양한 색깔들의 사연들을 안고 있을까? 그곳은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이자 기쁨과 슬픔이 교착하는 장소이고 욕망과 좌절의 도가니탕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기 위한 욕망으로 서울역으로 오고 가고, 못가진 자도 가진 자와 똑같은 꿈을 안고 오가는 곳이다. 그런데 아예 없는 자도 서울역으로 모인다. 그들은 무슨 꿈을 안고 서울역에 모이는 것일까? 아예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서울역에 모이는 것은 오가는 숱한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욕망의 열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마음속의 추위를 남의 곁불 쬐듯 숱한 욕망의 발길들이 혹 떨어뜨릴지 모르는 행운을 기대해서임은 아닐까?
안요한은 거기서 주님의 뜻을 만난다. 삼양동 판자집에서 불구의 할머니를 홀로 모시고 사는 진용이를 만난 까닭이다. 진용이는 돈이 없어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역에서 신문팔이를 하고 있는 소년이다. 중학생이 너무 부러워 교복과 모자를 벽에 걸어두고 산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진용을 보고 안요한은 비로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소명의 빛을 얻는다.
그는 말한다.
“내가 여태까지 그 빛을 만나지 못한 것은 위만 쳐다보고 온 내 허물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느 높은 곳에서 나를 비춰오기만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어느 높은 곳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빛은 오히려 낮은 곳에서, 그것도 스스로 베풀고 비추려 하는 곳에서, 그런 노력으로 자기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낮은 곳에서 스스로 찾아낸 소명의 불빛,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혼의 눈뜸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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