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의 교육사상
- 최초 등록일
- 2009.12.13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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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파 방정환의 교육사상에 관한 리포트입니다.
참고하시는데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1. 생애와 교육활동
2. 소파의 인간존중사상
3. 민족구원과 어린이 발견
4. 아동해방운동
5. 아동존중사상의 실천
1)출팔환동
2)예술활동
3)소년단체활동
6. 교육내용론
7. 교육방법론
8. 교육개혁론(생활교육론)
9. 소파 아동교육론의 현대적 의의와 교육사적 의의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생애와 교육활동
소파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출생으로 박경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하신 할아버지는 5살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치셨고, 두 살 위인 삼촌을 따라 학교에 갔다. 김중환 교장선생님의 눈에 들어 보성 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여 신 서당식과 군대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10살이 채 못 될 무렵 작은 할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배고픔과 가난, 설움의 소년시절이 시작되었다. 1908년 ‘소년입지회’를 조직했다. 이 ‘소년입지회’의 회원은 8~9명 정도로, 10~14세 동무들이 모여 휴일이면 토론회를 가졌다. 1909년 매동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그 이듬해 졸업을 하고, 그 해에 실업학교인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공부보다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독서에 주력하고 잡지 <청춘>에 투고를 시작했다. 소파는 담임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졸업을 1년 앞두고 중퇴하였다. 중퇴 후 총독부의 토지조사국의 사자생으로 취직하고, 이 때 친구 유광렬씨를 만나 그와의 토론으로 생각과 사상의 깊이를 더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면서 독서에 더욱 몰입하여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민족의식을 두텁게 했다.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인 권병덕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문했고 19세에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딸(용화)과 결혼했다. 그 해에 지하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신청년>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1918년 겨울 유광렬로부터 윌슨 대통령의 영향을 받아 일제침략으로 기우는 나라를 바로 잡기위해 <동원령>을 통해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였다. 21살 그는 장인이 교주이던 보성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교 윤익선 교장선생님이 체포되는 바람에 교내 <독립신문>에 3・1운동을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22세 때 가족마저 일본 관헌들에게 고통 받자 일본 동경유학의 길을 떠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전공하고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더 많이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개벽사의 동경주재 특파원을 역임했는데 일본 유학생에게 아동문학의 취지를 설명하고 어른의 생활이 비참할수록 복된 내일을 위해서는 아이들의 양성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천도교의 총의는 민족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소파는 이 때 아동운
참고 자료
강승규, 학생의 삶을 존중하는 교사, 동문사, 2008
안경식,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운동과 사상, 학지사, 1994
차호일,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사상, 이서원, 1997
송준석, 소파 방정환의 아동존중 교육사상의 실천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