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韻說, 格調說, 性靈說, 肌理說의 이해
- 최초 등록일
- 2010.03.19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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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금·원·명·청나라의 詩
2. 성령설
3. 신운설
4. 격조설
5. 기리설
6. 추사 김정희 [신문발췌]
7. 맺음말
본문내용
1. 금·원·명·청나라의 詩
중국 고전시를 극히 개괄적으로 말하면 당·송나라 두 시기에 내용과 형식이 대부분 완성되었고, 그 이후로는 특별히 새로운 발전은 없어졌다. 시인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시를 추구하기는 했으나, 배워야 할 대상으로 당시와 송시 가운데 어느쪽으로든 선택을 강요당하는 일이 많았다. 금·원나라의 시는 금나라의 원호문(元好問)과 같이 당시를 존중한 사람도 많았지만 대체로 송시의 영향을 받아 섬약한 시풍을 나타냈다. 명나라 때에는 이몽양(李夢陽)·하경명(何景明) 등의 <전칠자(前七子)>, 이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을 대표로 하는 <후칠자(後七子)>의 사람들이 당시특히 성당의 시를 높이 평가하여 의고적(擬古的)인 작품을 썼는데, 이들을 <고문사파(古文辭派)>라고 한다. 지나치게 배타적인 고문사파의 주장은 그 자체가 단순한 모방으로 타락해버린 적도 있어서 명나라 말기에는 당·송 절충의 시를 강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청나라 때에 들어와 고문사파의 세력이 힘을 잃어가자 당시 일변도의 풍조도 바뀌었고, 시인들은 저마다 당시 또는 송시 가운데에서 배울 대상을 찾게 되었다. 하나의 시대, 한 사람의 시인에게 얽매이지 않고, 당·송나라의 시를 겸하거나 또는 원·명나라의 시중에서도 대상을 선정하였다. 한편 그 가운데에서도 유행이 있었는데, 청나라 초기 왕사정(王士禎)은 성당의 왕유나 맹호연의 시의 여운을 중시하여 <신운설(神韻說)>을 주장하였으며, 중기의 심덕잠(沈德潛)은 이백·두보 시의 풍격과 음조의 전아를 존중하는 <격조설(格調說)>을 주장하였다. 또 규범에서 벗어난 정신의 자유를 외친 원매(袁枚)의 <성령설(性靈說)>은 명나라 말기 공안파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중시가 널리 읽혔다.
참고 자료
<<中國文學 第 41輯>>, 팽철호 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