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가례』의 구성과 내용 및 예 정신
- 최초 등록일
- 2012.12.19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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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자가례의 구성과 내용 및 예정신에 대해 알아보자
목차
1. 주자예학(朱子禮學)의 형성과 『주자가례(朱子家禮)』
2. 『주자가례』의 구성과 내용
3. 『주자가례』의 내용상의 특징
4. 『주자가례』에 나타난 예 정신
본문내용
1. 주자예학(朱子禮學)의 형성과 『주자가례(朱子家禮)』
(1) 주자예학의 형성
주희(朱熹, 1130~1200)는 1127년 북송(北宋) 멸망 후 남송(南宋)이 시작되던 고종(高宗) 건염(建炎) 4년(1130) 부친의 부임지인 남검주(南劍州)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났다. 부친 주송(朱松)은 이정(二程) 북송(北宋) 신종(神宗)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정이(程) 형제를 말한다. 양정(兩程)이라고도 한다.
과 사마광(司馬光, 1019~1086) 북송의 유학자이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란 역사책을 저술했다.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王安石)과 논쟁을 벌였다.
의 학문과 인물됨을 존중하였다. 주송의 학문은 주돈이(周敦, 1017~1073) 주염계(周濂溪), 주자(周子)라고도 불리는 그는 중국 북송의 유교 사상가이다.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닦았는데, 송(宋)대 유학(儒學)의 형이상(形而上)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동시대의 유학자 장재(張載)의 사상과 더불어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정이 형제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간 송(宋)대 도학(道學)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되었다.
가 천년 이상 끊겨진 유학(儒學)의 정통을 부활하여 제자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 1033~1107) 이정(二程), 양정(兩程), 이정자(二程子)라고도 불린다. 정호는 명도선생(明道先生)으로 불렸고, 정이는 이천선생(伊川先生)으로 불렸다. 이들은 이른바 `낙학(洛學)`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파를 창시하여 훗날 주희(朱熹)가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중 략>
상·제례 때의 진찬에서도 주인과 주부는 동등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졸곡(卒哭)의 진찬 때 주인은 생선과 고기를 올리지만 주부는 손을 씻어 수건에 닦고 면식과 미식을 올린다. 주인은 국을 올리고 주부는 밥을 바친다. 이를 사시제 때의 진찬을 통해 살펴보아도 어느 한 편에 치우쳐 일을 담당하지 않았다.
제사에서도 아헌(亞獻)은 주부가 올렸다. 상례의 우제(虞祭)와 졸곡·부()·소상(小祥)·대상(大祥)·담제(祭) 등에서도 아헌은 주부였다. 계문(啓門)하고 나서도 주인과 주부가 차를 받들어 고(考)와 비()의 앞에 나누어 바치고 사신(辭神) 제사(祭祀)를 지내고 신(神)을 보내는 일을 말한다. 재배(再拜)하고 지방(紙榜)과 축(祝)을 불사른다.
참고 자료
조선시대 사대부의 관혼상제의 차례와 복식 : 『주자가례』와 『사례편람』을 중심으로 / 박양례
『주자가례』의 형성과 조선 수용에 관한 연구 / 조미라
여성의 눈으로 『주자가례』다시 읽기 / 이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