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대승기신론소
- 최초 등록일
- 2016.05.16
- 최종 저작일
-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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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원효의 생애
2. 대승기신론의 주요내용
3. 대승기신론소와 별기의 성격
4. 원효 사상의 역사적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원효의 생애
원효(元曉, 617~686)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지 90년 만에 태어나서 우리나라 역사 상 최고의 불교 사상가가 된 사람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경상북도 압량군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성은 설(薛)이며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으로 그 의미는 ‘새털’이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밤나무 밑에서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다급한 중에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紗羅樹)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해서 아기를 낳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당시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전해진다. 원효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14~15세에 자기의지로 출가하여 의상(義湘)과 함께 전주 고대산(孤大山)에 머물러 있던 고구려 고승 보덕(普德)에게『열반경』과『유마경』등을 배웠다. 하지만 나중에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고 난 이후에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원효는 진덕여왕 4년에(650)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현장(玄奘, 602~664)에게 유식철학(唯識哲學)을 배우려고 고구려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첩자로 오인 받아 여러 날을 갇혀 있다가 되돌아왔다. 그리고 10여년 뒤인 661년에(당시 45세) 백제가 망해 바닷길이 열리자 이번에는 바닷길로 당나라를 가기 위해 당항성(黨項城)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비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땅굴에서 자게 되었는데, 다음 날 그곳이 오래된 무덤임을 알게 되었다. 비가 계속 내려 하룻밤을 더 지내게 되었는데 귀신들이 장난을 쳐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때, “똑같은 장소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一切唯心造)는 진리를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게 된다.
입당 유학을 포기한 후 심법을 깨달은 원효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로 칭하고, 실계(失戒)한 파계승으로 ......<중 략>
참고 자료
원효 ․ 의상 ․ 지눌 著, 이기영 譯,『한국의 불교사상』, 삼성출판사, 198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7
임병주 지음,『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들녘, 1998
황광욱 ․ 정성식 ․ 임선영 지음,『한권으로 읽는 한국철학』동녘, 2007
정구복 지음,『인물로 보는 삼국사』, 글로북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