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양성지의 사회 정치 사상 - 국방사상
- 최초 등록일
- 2005.12.11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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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성지의 사회 정치 사상 중 국방사상에 중점을 둔 글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군액증대론 軍額增大論
(2) 부대개편안 部隊改編安
(3) 보법개혁론 保法改革論 , 기타
본문내용
15세기의 관료=학자로서 양성지梁誠之만큼 국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반적인 군정개혁안軍政改革案을 제시한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전후 십수차에 걸쳐서 군정개혁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그 밖의 상소문에서도 군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군정에 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생존했던 15세기 후반기는 조선왕조 역사상 국방체제가 가장 잘 정비되고, 남북 외적外敵의 침투를 격퇴하면서 실지失地를 회복하여 신라 통일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양성지의 국방사상은 이렇듯 조선왕조의 국세國勢가 날로 팽창하는 여세를 휘몰아서 수복 확장된 국토를 수호하는데 더욱 만전을 기하고, 나아가서는 요동遼東의 구강舊疆을 수복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남방 왜구倭寇의 침투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였지만, 그보다는 북방문제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요동지방에 대한 명明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만주 동남지역에서의 여진족女眞族의 침투가 격화되어 이것이 현실적으로 조선측의 북진정책과 정면으로 충돌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아가서는 중국 북부에서의 달달족達達族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언제 다시 풍운을 몰고 올지 모른다는 위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황제 영종明皇帝 英宗이 50만 대군으로 달달족을 친정親征하였다가 대패하고 포로로 잡힌 사건은 양성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가 문종文宗 즉위년에 <비변십책 備邊十策>을 상소한 것은 이것이 직접 동기가 되었다.
양성지는 자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면서 이에 대처하는 포괄적인 군정개혁안을 개진하고 있거니와 그의 개혁안은 군액확대 軍額擴大, 부대개편部隊改編, 무기武器정비, 군량미軍糧米 확보, 방어진지 구축 훈련강화, 지휘관 양성, 군사軍士에 대한 구휼救恤 등 큰 문제에서 작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배려되고 있다. 그리고 문무文武의 동등한 대우라든가, 상무정신尙武精神의 양양을 위한 척석擲石과 대야례大射禮의 실시, 그리고 국가의식의 양양을 위한 문교정책의 혁신등이 간접적으로 국방의 강화와 관련된다고 볼 수가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