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역사]알렉산드르 1세의 개혁정치
- 최초 등록일
- 2006.10.1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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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러시아 역사에서 알렉산드르 1세 시기에 대한 정리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알렉산드르 1세의 성장배경
알렉산드르 1세의 개혁
빈회의와 신성동맹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 후기
나오며
본문내용
들어가며
차크스는 그의 책에서 “뾰뜨르 대제의 러시아와 볼쉐비끼 혁명 사이의 200년 동안, 과거의 권위주의적 마법이 풀리고, 국가 형태가 헌법 속에서 자유로워지며 러시아의 발전 과정이 서유럽의 역사적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시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 초기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구라도 잠시 동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왜냐하면 예까쩨리나 치세 말기의 억압적인 시기와, 그녀의 후계자 빠벨의 잔혹한 변덕과, 프랑스 혁명 자체가 러시아의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12년 이전까지 러시아가 필요로 했던 것은 오직 입헌정부의 등장과 농노제의 폐지라는 것을 확신한 사람은 바로 황제였으며, 어쩌면 그는 신하들보다도 더욱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과거의 불행과 정치적 과오의 유산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광대하고 낙후되고 잘못 통치된 제국의 그 어디에, 뾰뜨르 대제 이후로는 근본적 변화가 없었던 사회와 정부 체제를 정상에서부터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개혁은 필요했지만 필요한 합법성과 합의가 이루어진 곳도 거의 없으며, 그리고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서유럽의 예는 러시아의 조건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뻬쩨르부르그의 관료적 절대주의와 혁명 속의 유럽이 접촉할 수 있는 지점은 아직 거의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알렉산드르의 신념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든 간에, 그가 제공하거나 제공하려고 했던 기회는 러시아 사회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입헌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법률 규정은 지극히 폭좁은 기초만이 있었을 뿐이었고, 농노제의 종결을 향한 길은 이상주의일 뿐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자유주의에 대한 충동과 전제적 자기의 입지를 기묘하게 혼합시키고 있었던 까닭으로 러시아에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완벽하게 실시하려고 노력한 통치자가 되지 못하였다. 실제로 그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던 유일한 헌법 형태는 전제정치의 통치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어야 했고, 농노의 해방이 귀족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불가능한 조건하에서만 귀족들이 동의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를 "수수께끼의 짜리", 스핑크스, "왕관을 쓴 햄릿" 그리고 그밖에도 이와 유사하게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호칭들이나, 알렉산드르 1세는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자로 칭송되기도 했지만, 바이런을 포함하는 그밖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는 반동주의자로 비난을 받기도 하는 전제군주의 성격과 행동에는 추정되는 현저한 모순적인 평가들은 학자들의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 차이와 그의 신비주의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 자료
러시아사 / R.D 차크스 / 역민사
러시아의 역사2 / 니콜라스 V. 랴자노프스키 / 까치
풀어쓴 서양근대사 강의 - 이세희 - 삼영사
알렉산드르 1세 치세 초기의 세나트 개혁에 대한 재해석 - 오두영